난곡동 재개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찮게 예전 재계발 되기전 난곡동 사진을 보게 되었다.

나도 어릴적 난곡동에서 살았기에 동네 골목을 친구들과 뛰어놀던 추억이 생각났다.

재개발이 되기 전, 난곡동은 산 한자락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던 흔히 말하는 달동네의 한 곳이었다.

우리집을 비롯한 친척들이 대부분 난곡동에 살았기 때문에

어렸을적 부터 친척들과, 친구들과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며 놀았었다.

얼마전 휴가를 나와서 난곡동을 찾았다. 한참 재개발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집들을 때려부수고 있었는데

지금은 재개발이 끝나 내 기억속의 난곡동은 찾아볼수가 없었다.

내가 뛰어놀던 그 길을 걸어올라가 보았다. 예전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서있는 이곳이 어디쯤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높이 솟아있는 아파트 들은 왠지 부적합해 보였다. 

두사람이 간신히 다닐 수 있는 골목은 이제 왕복 2차선의 도로로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다.

어느 골목(아니 이제는 도로다.)을 가던지 개 짖는 소리는 들어볼 수 없었다.

예전에 진돗개 같은 개들이 살던 곳에 지금은 조그맣고 여린 애완견이 주인인양 위풍당당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먹을것을 사 가지고 가던 아주머니에 손엔

대형 슈퍼마켓과 편의점의 로고가 찍힌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내 기억속의 난곡동은 이제 다신 볼수없는 추억이자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난곡동에서 바뀌지 않은 것은 하늘 뿐이었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9413.html

관악구의 역사는 ‘밀려난 자’들에서 시작된다. 1963년 용산구 재개발 과정에서 철거민 450가구가 현재 신림사거리 신원동(옛 신림1동) 4평짜리 간이 주택으로 이주한 것을 시작으로, 1968년까지 수해민과 철거민들이 관악구로 들어온다. 1963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서울시 영등포구 ‘관악출장소’로 편입될 당시 7140명에 불과하던 인구가 이런 집단 이주를 거쳐 23만8870명으로 불어난 1973년에 영등포구에서 분리돼 ‘관악구’가 된다.

빈곤의 이미지는 ‘난곡 지역’ 때문에 더 굳어졌다. 서울 지역 최장수 달동네 가운데 하나였던 난곡 지역은 2000년부터 본격적인 재개발에 들어갔다. 좁은 집들이 바투 모여 있던 가파른 산등성이에는 아파트가 병풍처럼 늘어섰다. 2008년 관악구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버스 종점을 아우르는 옛 신림7동은 ‘난향동’으로, 난곡 입구는 옛 신림3동에서 ‘난곡동’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영희(59·가명)씨는 난향동 버스 종점 곁에서 분식 노점상을 30년 동안 해왔다. 그는 군만두 4개를 올릴 수 있는 접시에 떡볶이를 가득 담아 1인분 1천원에 팔았다. “이렇게 팔아서 남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 “옛날 난곡 시절에 먹었던 애들이 결혼해서도 다시 찾아와. 아직 동네에도 배곯는 애들이 있고…. 가격은 가능한 안 올려.” “그러니까 주민들이 우리 장사를 지지해주잖아.” 회사를 퇴직한 뒤부터 김씨의 일을 돕는 남편(65)이 말했다. 어린아이 손을 붙들고 가게를 찾는 엄마들이 끊이지 않았다.

 

난곡동 풍경

http://blog.ohmynews.com/nangok/category/14236

 

2003년 철거 전까지 난곡의 모습. 산자락에 동그랗게 안겨 있는 모습이다

 

2008년 신림7동 난곡. 새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http://www.cowal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4

 

지난해 1월 아파트 단지 재개발 계획이 확정되면서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남은 "난곡"을 찾아가 보았다. 언제 철거될지 몰라 불안해 면서도 아직까지 이주하지 못한 세대가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곳. 수십년을 살아온 터전이 차차 허물어지고 있는 그 곳, 난곡의 풍경을 담아본다.

기자의 신분으로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이번 기사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피해보고 싶었다. 기사란 자고로 가지의 눈에 비친 세상을 공명정대하게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러기에 이번 취재는 지나치게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컴퓨터의 빈화일을 열었다 닫은지 수차례, 마감시간을 한뼘이나 넘기고서야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가눌길이 없다. 가난은 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코 가난은 천하지도 않다. 그들의 가난이 당신의 가슴을 동정으로 복받쳐 오르게 한다면, 이 기사는 잘못된 것이며, 이는 불쾌할 일이다. 왜냐 하면 그들의 가난이, 곧 나의 가난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가난이기 때문이다.

▲난곡

처음이다. 걸어서 취재를 나가는 것은. 찾아가야 할곳은 <난곡세입자주거대책위원회 (이하 주대위)> 기자의 집에서 15분만 걸어 올라가면 되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관악구 신림7동 산 101번지. 흔히 난곡 달동네라고 불리우는 곳. 기자는 그 산동네 밑의 어느 다세대 주택에 사는 난곡 주민이다. 언제쯤 우연히 재래시장 근처에서 마주쳤을 지도 모를 그들, 종점으로 들어가는 차를 피하다가 한번쯤 부딛쳤을 지도 모를 그들,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를 고르다가 눈이 마주쳐 겸연쩍은 웃음을 나누었을지도 모르는 그들, 그들에게 새삼스레 카메라를 들이대야 한다는 사실이 기자에게는 영 껄끄러웠다. 난곡 버스 종점을 지나 비탈진 길을 따라 약간 오르다 보면 낡은 주대위 건물이 보인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본다. 사무실 안 사람들이 모두 기자를 돌아본다. 묘한 경계의 눈빛, 비스듬히 맨 카메라 가방을 어디론가 숨기고 싶어진다.

 

웬지 분주해 보이는 사무실 분위기에 이유를 물으니 바로 전날 저녁 철거용 포크레인이 들어왔었다고 알려준다. 다행이 수습을 마쳤지만, 갑작스러운 일이었는지 놀란 기색들이 역력하다. 법적으로 아무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그들은 철거 소식을 듣게되면 몸으로 라도 이를 막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포크레인을 몸으로 막아내다니, 정말 무지막지한 사람들이라고,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날 밤 타이어로 바리케이트를 만들던, 밤을 세워 몸으로 포크레인을 막아내던 그들은 지치고 선량한 눈빛으로 기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제 삶의 터전이 짓밟힌다면,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 않겠느냐고. 갈곳 없이 내몰려 벼랑에 섰다면 엇이 두렵겠냐고."

 

낙후보다는, 소외된 지역

 

주대위 사무실에서 만난 선한 인상의 주대위 위원장인 하주태 씨는 난곡동에서 15년넘게 살아왔고, 지난 10월 주대위가 구성된 이래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 오고 있는 난곡의 터주대감이다. 그는 난곡 달동네 지역을 낙후된 지역이라기 보다도 소외된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60년대만 해도 여기는 대부분 산이었지요. 실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여기를 일군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 중에서도 더 가난한 사람들은 천막집을 지었어요. 흙집도 있었구요. 하지만 이런 가난보다도 달동네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 더큰 문제었죠. 사실, 88 올림픽 이후에 무슨 우리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면서 "영세민" 이라는 개념자체가 사라지게되고, 서민이라는 개념만 남게되죠. 그래서 정부의 모든 정책이나 지원또한 서민을 위주로 시행되구요 영세민 대책이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죠. OECD 가입 후로 상황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전국 각지에서 나름대로의 사연을 가지고 모여든 난곡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한창 많았을 때가 2,500세대에 가까웠을 정도라고 한다. 정든 고향 떠나 수십년을 살아온 이 도심의 낡은 변두리는 그들에게 제2의 고향이었으리라. 지금은 2000여세대 정도가 떠나고 아직 보상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500여 세대만이 남아 난곡의 마지막 겨울을 나고 있다. 한때는 가난 하지만 삶의 활기로 북적거렸을 골목에는 이제 을씨년 스러운 겨울 바람만이 빈 골목을 휘감고 있었다. 작은 희망이지만 믿음을 잃지 않았을 그들의 눈가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의 주름이 가득했다. 누가 이 철거를 단순히 낡은 집을 부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 개발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속모르는 사람들은 이야기 할 것이다. 재개발을 하면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 설 것이고, 그러면 그 아파트에 들어가 살면되지 않느냐고, 철거민에게는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것 아니냐고. 그러니 자기가 사는 지역을 개발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왜 싸우고들 그러냐고. 근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실제 난곡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200-300만원 많아야 500만원을 넘지 않은 전제집에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주비용 이래야 4인가족 기준 660만원. 달동네룰 나가서는 방하나짜리도 얻을 수 없는 돈이다. 임대아파트 또한 살고 있는 사람모두에게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위 "적격자" 라는 것이 되어야만 입주권이 확보된다.

어찌어찌하여 입주권이 확보되었다고 할지라도 임대 아파트에 거저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로 15만원정도 되는 돈을 감당하기란 대부분이 부정기적인 수입을 가지고 있는 건설 노동자나 독거 노인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다 보니 철거는 그 지역에서 살아온 철거민들의 주거 수준을 향상시키기보다도 그들을 또 다른 달동네로 내몰았던 것이 사실이다. 300만원짜리 달동네 전세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래야 또 다른 달동네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난곡은 봉천동, 사당동, 청계천등의 판자촌이 헐릴 때 마다 떠밀리듯 살던 곳을 등져야 했던 그들이 마지막으로 떠밀려 올 수밖에 없었던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이다. 이제 그곳을 헐어버리면, 서울에 달동네는 남아 있지 않다. 가난하다고, 옹기종기 모여살던 푸릇한 공동체의 기억까지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달동네는 사라지는데, 달동네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다시 어디론가 떠돌아야 한다.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수 있을까? 하주태 위원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만약 우리나라의 재개발이 흡수 재개발, 그러니까 개발이 그땅에 사는 원 주민들을 흡수 하는 그런 방식이었다면 이런 문제까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대단위의 달동네가 형성 될 수도 없구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냥 밀어내기 방식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런 문제제기들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거죠,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도대체 정작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개발을 통해서 혜택을 보기나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요."

 

가장 기본적인 것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고 있는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개발은 진행되고 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보상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철거한 집을 다시 지어내 라는것도 아니도 전세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 주민등록상의 이유로, 기타 여러 이유로 적격자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일부라도 임대아파트 입주의 기회를 다시 주는 것과 현재 2년 거치 일시상환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주택 전세금 융자를 좀더 장기간에 걸쳐서 갚을 수 있도록 하여 그 돈을 융자받아 전세라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뿐이다.

주대위 사무실에서 만난 박할머니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난곡동 꼭대기에 있는 박 할머니의 방은 300만원 짜리 전세 이주 보조금 2-300만원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새로 방을 구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75세의 연세에도 정정하신 할머니지만 전날 저녁 포크레인이 들어왔었다는 소식에 놀라 사무실로 달려오셨다. 그래도 아직 사람사는 집인데 어쩌기야 하겠냐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못내 불안한 기색이 느껴진다.

"충주에 아들이 있어서 생보자도 안되고 아무 혜택을 못 받아요. 여기서 35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되니까 속상허지 뭐. 처음에는 여그 다 산이었어. 그래도 정들었는데. 어떻해야 될른지 눈앞이 깜깜혀."

할머니의 선한 눈매와 상관없이 개발은 진행될 것이다. 높은 비탈길을 오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못내 쓸쓸하다.

 

밝음은 늘 어둠에게 빚지고 있다

날씨는 영 꾸물꾸물했다. 사진을 찍기에는 안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기자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날씨가 좋은 휴일 날이면 마치 난곡 골목은 관광지 같다고들 하였다.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를 카메라에, 원고지에 담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댄다 했다. 너무 많은 취재진이 들락거린다 했다. 그래서 기자에게는 사진찍기에는 별로 안좋은 날씨이지만 차라리 관광지처럼 북적이는 골목을 보지 않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이제 가난은, 그런 것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적인 도시인들에게 자극이 되는 소재, 서울에 저런 곳도 있구나. 한번쯤 놀라게 하는 소재. 하지만 정녕 모르겠는가, 이 시대의 모든 밝음, 모든 발전, 모든 영광이 있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모든 어둠, 모든 소외, 모든 아픔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당신의 안락한 삶은 늘 그들의 아픔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날씨가 안 좋아서인지 골목길에는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기자는 한적하게 비탈진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수년전 서로 도우며 의좋게 지냈을 그들의 평화 로운 한때를 상상해 보았다. 오늘같이 날씨가 꾸물꾸물한 날이었다면, 고소하게 빈대떡 지지는 냄새가 났을 골목. 아이들이 좁은 골목을 벗삼아 술래잡기를 했을 골목. 술 마시고 휘청휘청 하면서도 제 몸 누일 작은 집을 찾아 붕어빵 한 봉지를 사들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을 향하였을, 골목.

이곳을 단지 낡은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이 집들을 헐어내고 새 아파트를 짓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하지면 이곳도 사람사는 달동네 였음을. 지친 인생들이 작은 꿈이나마 키워가던 보금자리임을 조금만이라도 생각한다면 이 재개발이 한번쯤 망설여지지 않았을까?

이제 난곡 달동네는 사라질 것이다. 이 시대의 모든 과오와 짐을 홀로 떠안고서. 그러나, 난곡이 사라진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의 싹까지 사라질 수는 없다. 설사 낡은 집들이 철거 되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그 안에서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던 그 삶들의 새삼스런 소중함까지 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가난한 동네 하나를 없애 버린다고 해서, 한때 그토록 가난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픈 시절이 있었다는 것까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글 · 사진 박채란 객원기자(rhanair@hanmail.net)

 

 

그외 철거 전 상황을 기술한 기사 

http://www.lafent.com/inews/news_view.html?news_id=102982

 

http://www.simin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1

 

 

아래  http://blog.ohmynews.com/nangok/177653

난곡을 떠난 '이웃사촌'은 어디로 갔을까
재정착율 8.7%, 쫓겨난 91.3%의 사람들을 찾아서

[1부]어디로 갔을까 2008/06/23  [취재 · 글 김지원 / 기획 오연호]



“아이고, 거기 무서워서 못 가.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지.

이분옥(65)씨는 판자촌 난곡 자리에 새로 들어선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 단지에 가 봤냐는 질문에 손을 내 젓는다
.
이씨는 난곡에서 26년을 살았다. 하지만 재개발로 지어진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는 그의 차지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  근처의 주택에 살고 있다
.
"
거기 가봤자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어, 원래 살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났고, 순 모르는 사람들 판이지
."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던 난곡은 2006년 완전히 바뀌었다. 동네 외양뿐만이 아니다. 사람들도 바뀌었다난곡의 재개발을 맡은 주공에 따르면, 사업시행 인가 당시 난곡에 살던 주민 2,529세대( 15,000) 220 세대만이 지금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전체 가구의 8.7%에 불과하다. 원주민들이 체감하는 재정착율은 더 낮다. 5% 정도.

판잣집만 아파트로 바뀐 게 아니라 살던 사람들도 대부분 바뀐 것이다 

70년대 중반 난곡의 '국수클럽' 엄마들. <오마이뉴스>는 난곡을 떠난 그들을 찾아나섰다.

이상균(68)씨는 난곡의 이발사였다. 38년을 난곡에 살며 사람들의 머리를 깎았지만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곳의 아파트가 아닌 바로 옆 단독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중풍을 앓고 있는데, 재개발을 병의 원인으로 꼽는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성화에 살던 집을 팔아 크게 손해를 봤고, 아파트 공사로 인한 소음에 속을 썩어야 했다. 새로 계획된 GRT(궤도버스) 공사로 가게가 재개발 지구에 또 다시 포함되어 이발소 또한 그만두고 말았다.
365일 쉬는 날 없이 일했는데… 착한 게 바보지 뭐.

살던 터전에서 쫓겨 나면서도 영악하게 셈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상균씨의 넋두리다
.
재개발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이씨 만이 아니다. 재개발 당시 권리자(가옥주) 2529세대 중 17.2% 435가구만이 실제로 난곡의 원주민이었다. 난곡은 외지인의 투기장이 되었고, 아파트에 입주할 돈이 없는 사람들 대부분은 집을 팔아버렸다. 2001년 재개발 사업인가 때 3.3㎡ 당 500만원이던 아파트 값은 현재 1,400만원까지 뛰었다. 그러나 이득은 대부분 원주민 대신 외지인에게 돌아갔다
.


정세리(20)씨는 판자촌 난곡이 완전히 철거되기 직전인 2002년까지 그곳에 살았다. 그 때가 12살이었고 지금은 20살 대학생이 되었다. 재개발 이후 근처 신림 3동으로 이사 해 살고 있다. 정씨는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박탈감을 느낀단다. “난곡에서의 좋은 추억을 앗아갔다”며 “쫓겨날 때의 화나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고도 했다
.
2002
년 신림복지관의 조사에 따르면 정씨처럼 철거 이후에도 난곡 근처에서 살고 있는 달동네 난곡의 원주민은 72.9%나 된다. 인근인 관악, 동작, 금천구로 옮긴 9.3%까지 합치면 82.2%. 주민의 대다수가 멀리 가지 않고 근처에 재정착한 것이다
. 하지만 이웃관계는 예전만 못하다. 길에서 만나면 인사나 할 뿐,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일은 옛날 이야기가 돼 버렸다.


이순덕(66)씨는 “옛날이 그립다”고 했다. 예전 난곡에 살 때 느낀 이웃의 정이 생각나서다. 68년부터 89년까지 난곡에 산 이씨는 “이웃 덕분에 우리 막내가 살았다”고 한다. 판자촌에 살 때 집에 불이 났는데 당시 갓난 아기였던 막내를 옆집 아줌마가 구해줬기 때문이다. “큰 불이었는데도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불을 꺼 줘서 금방 불을 잡았다”며 “그 땐 정말 이웃사촌이 있었다”고 말했다

달동네 난곡시절의 이웃사촌들(90년 즈음). 모두 난곡을 떠났다. 취재팀은 이들 중 6명을 만났다.

김혜경씨(64, 현 진보신당 고문)는 “난곡에는 정말 이웃사촌이 있었다"면서 "공동체를 통해 지역 자치를 이룬 사례”라고 했다. 김씨는 72년부터 철거 직전까지 달동네 난곡에 살았다. 김씨는 이웃사촌 문화의 대표적 예로 70년대 초에 시작된 ‘국수클럽’을 들었다. 한달에 100원씩 내서 국수를 삶아먹으면서, 서로 애도 봐 주고 생필품 공동구매나 의료사업도 함께했다. 국수클럽은 이후 보건소가 먼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난협)’이라는 모임으로 확장됐다. 76 118세대로 시작한 난협은 10년 동안 2200세대로 커졌다. 끈끈한 이웃의 정이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 것이다.
재개발로 판자촌 난곡이 사라지면서 그들만의 돈독한 이웃사촌 문화도 사라졌다. 아파트촌 난곡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서울의 일반적인 아파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달동네 난곡의 이웃사촌들이 떠나고 들어선 이곳에서 예전만큼의 이웃관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재개발로 난곡을 떠난 사람들이 그 후,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곳은 없다. 2002년 신림복지관이 주민이주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이 전부다. 대한주택공사, 동사무소 어디도 ‘난곡을 떠난 이들의 그 후’에 대해 알지 못한다. 국가는 판자촌 동네를 없애는 데만 급급했지 그곳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그 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난곡을 떠났던 윤장한(50)씨는 또 한 번 짐을 싸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신림 6동이 뉴타운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재개발로 옮겨 온지 8년 만이다.
2008
년 서울의 여기저기에서는 뉴타운의 삽질이 계속되고 있다. 뉴타운은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난곡 재개발이 빚어낸 '상처'를 반복하고 있다. 원주민의 재정착율이 17% 정도로 낮게 예상되고, 살던 곳과 생계를 잃은 주민들에 대한 대책도 미미하다. 이웃사촌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달동네 난곡은 사라졌다. '뉴타운 난곡'의 아파트촌에 들어가지 못한 15천 명의 그 많던 난곡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마이뉴스>는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한 채당 수억씩 하는 아파트를 얻은 대신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지, 그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어떻게 복원 가능한지, 난곡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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